5월 7일은 배우기 쉽고 쓰기 쉬운 한글을 만드신 세종대왕이 태어나신 날. 원래는 5월 15일이 세종대왕 탄신일이고, 그래서 우리 민족의 스승인 세종대왕을 기려 이날을 스승의 날로 삼았다고 하는데, 세종대왕께서 사시던 시기의 세계사 인물들이나 사건들의 날짜는 대개 오늘날 그레고리력이 만들어지기 전의 달력인 율리우스력을 따른다고. 그래서 그레고리력으로 환산하면 세종대왕님 생신이 5월 15일, 율리우스력으로 환산하면 5월 7일이라고 한다. 어쨌건 문자를 만든 분을 이 나라의 스승으로 대대손손 기념할 정도이니, 이 얼마나 대단한 일인가.
덕후들의 세계에서 꽤 유명한 언어가 몇 가지 있다. 대표적으로 톨킨의 '반지의 제왕'에 나오는 '엘프어', 영화 '아바타' 시리즈에서 나비족이 사용하는 언어, 그리고 스타트렉 시리즈에서 너무나도 유명한 '클링온어'. 그런데 이 언어들은 그냥 아무렇게나 만들어진 언어가 아니라 '언어학자'들이 만든 언어로 알려져 있다.
반지의 제왕 같은 경우는 원작자인 톨킨 본인이 언어학자였으며, 아바타에 나오는 나비어도 폴 프로머(Paul Frommer)라고 하는 언어학자가 만들었다고 한다. 스타트렉의 클링온어도 마크 오크랜드(Marc Okrand)라는 언어학자가 만들었다고 한다. 슈퍼맨 세계에 나오는 크립톤어도 비슷한데, 2013년 개봉한 영화 '맨 오브 스틸'에서 사용하기 위해서 크리스틴 슈라이어(Christine Schreyer)라고 하는 언어학자가 크립톤어를 만든 바 있다.
그래서 날이 날인 만큼 픽션의 세계, 히어로 만화의 세계에 존재하는 가상의 언어들과 문자들에 대해서 한번 살펴볼까 한다. 특히 우리 히어로 덕후들에게 유명한 '슈퍼맨'의 크립톤어와 크립톤 문자.
영화 속의 크립톤어는 일단 '표음문자'. 21개의 자음과 6개의 모음으로 이루어져 있다. (한글과 비교하면 한글은 기본 자음이 14개, 모음이 10개, 쌍자음과 이중모음 합치면 자음이 19개, 모음이 21개, 총 40개다.) 크립톤어의 기본 모음 6개는 '아오AO', '아A', '우U', '에E', '이I', '애AE'. 가령 크립톤 자음 알파벳 맨 첫 글자는 'ㅍP'랑 이 모음들을 결합하면 '파오PAO', '파PA' '푸PU', '페PE', '피PI', '패PAE'가 된다. 특이한 점은 모음 표기는 동일해도 결합되는 자음이 좌우가 바뀌느냐 위아래가 바귀느냐에 따라 발음이 달라진다는 점. 기본적으로 모음이 모자처럼 위에 붙고 자음이 아래 붙는 시스템인데, '파오'에서 아래에 붙은 자음을 위아래로 뒤집으면 '페'가 되고, 좌우로 뒤집으면 '피', 위아래 좌우를 모두 뒤집으면 '패'가 되는 식이다. 그 외에 모음이 단어의 끝에 붙거나 할 경우 '아' 발음은 '오'로 바뀐다던가 하는 규칙이 몇 가지 있다.
이걸로 문장을 만들었을 때 어순 같은 경우는 우리 한국어 계열 언어의 어순과 비슷하다. 세 문장만 실제 크립톤 알파벳을 이용해서 적어본다.
'벤 무 힌 마'라고 하면 벤=나, 무=너, 힌마=감사합니다. '나는 너에게 감사합니다.' 줄여서 '무힌'=너에게 감사
'무테 사오딘 구랜 니카'는 무테=너는, 사오딘=혼자, 구랜=이다, 니카=아니다. '너는 혼자가 아니다.'
'무테 벤 마 미주 구랜'은 무테=너는, 벤=나, 마=의, 미주=세상, 구랜=이다. '너는 나의 세상이다.'
'라오 마 잰 파오라 두한'이라 하면, 라오는 크립톤의 태양신이자 최고신, 마=의, 잰=빛, 파오라=우리를, 두한=따뜻하게하다. '라오의 빛이 우리를 따뜻하게한다.'.
'텔레 마 힐롤 파오라 캄도'라고 발음되는 문장이 있다 치면 텔레는 크립톤의 지혜의 신, 마=~의, 힐롤=지혜, 파오라='우리를, 캄도=인도한다. 라고 해서 '텔레의 지혜가 우리를 인도한다'는 뜻.
'로라 마 신다 파오라 히포투'라고 하면 '로라는 크립톤의 미의 여신, 마=의, 신다=아름다움, 파오라=우리를, 히포투=격려하다. '로라의 아름다움이 우리를 격려한다.'
'유다 마 넴로 파오라 히로라'. '유다'는 그립톤의 사랑의 여신이자 결혼의 여신, 마=의, 넴로=네 개의 달, 파오라=우리를, 히로라=보호한다.
위에 표시한 거 보면 모음을 머리 위에 길게 삿갓처럼 이어서 썼고, 띄어쓰기 대신에 모음의 첫부분과 끝부분을 한자의 비스듬한 갈고리 필획을 연상시키는 모양으로 길게 늘여서 단어 사이를 구분지어놨다. (쓰기 너무 어렵고 복잡하다. 한글의 위대함을 다시금 절감.)
만화는 영화와는 좀 다르다. 위의 반지의 제왕이나 아바타나 스타트렉, 맨오브 스틸 전부 TV나 영화로 만들어진 것이라 소리가 반드시 동반이 되는데, 만화는 매체 특성상 소리가 없이 눈으로만 보는 매체다보니 만화 전용으로 문자를 만들 때는 구태여 소리에 크게 신경을 쓸 이유가 없다. 물론 읽는 방법도 아울러 가르쳐준다면 좋겠지만, 외계의 언어라고 인지만 되면 목적을 달성한 것이다.
그래서 처음에 크립톤어를 만들 때는 꼬불꼬불한 글자를 먼저 외계어로 만들어내었다. 손으로 썼다기 보다는 그림에 가까운 글자들이었다고 보면 된다. 그래서 크립톤어 역사를 거슬러가면 어디까지 가냐 하면 1950년대까지 간다. 1950년대에 슈퍼맨이 고독의 요새를 처음 만들고 그 안에 히트비전을 이용해서 크립톤어로 일기쓰고 하는 장면들이 나오는 게 시작이었다. 크립톤어로도 쓰고 영어로도 쓰고, 2개국어로 동시에 일기를 쓰는 장면이 있었다. 그 당시 사용된 크립톤어를 보면 어떤 특별한 문자가 정해져 있지는 않았다. 그때그때 작가가 마음가는대로 외계어를 그려넣은 것이었다. 그래서 어떤 때는 고대 페니키아 문자를 닮기도 하고, 어떤 때는 일본어의 히라가나 같기도 하고, 어떤 때는 훈민정음의 한글 글자체 같기도 하고, 어떤 대는 아랍문자나 태국 문자 같기도 하고, 정말 그때그때 달랐다.
그러다가 60년대 어느 팬이 기준없이 그려지던 이 크립톤어에 대해서 질문을 던진다. 독자 편지란에다 '기왕 크립톤어를 만화 속에 사용할 거면, 중구난방하지 말고 크립톤어 알파벳을 한번 만들어 보시죠? 영어 알파벳과 대칭되도록 26개의 문자를 만들어보세요'라고 제안을 하게 된다. 이 제안이 이후 크립톤어 개발의 기준이 되긴 하는데, 그 당시 독자 편지에 대해서 편집자 넬슨 브리드웰이 이렇게 답변을 한다. 깊은 생각을 하고 한 답변은 아니고 장난조로 한 답변이었던 같은데, 내용이 이러했다. '크립톤어는 118개의 알파벳으로 이뤄져 있습니다! 심지어 크립톤어의 단어들은 아주아주 길어서 우리 영어의 가장 긴 단어조차도 크립톤어의 가장 짧은 단어보다 짧다고 보시면 됩니다.' 그러니까 이 답변의 취지는 '크립톤어는 우리가 생각하는 것보다 훨씬 복잡한 언어니, 만화는 만화로 보시고 너무 깊이 따지진 말아주세요.'하는 의미였다.
그런데 처음엔 농담 삼아서 이런 답변을 하긴 했지만 넬슨 브리드웰 본인도 워낙에 슈퍼맨 광팬이었고, 슈퍼맨의 능력 하나하나에 대해서 과학적인 설명을 덧붙이고 따지고 하던 것으로 유명했던 인물이었다. 그러니 답변을 하고도 이 말이 계속 마음에 걸렸다. '118개의 문자로 구성됩니다'라고 던져놓고 난 다음에 정말 118개를 만들어보려는 시도를 해보게 된다.
그렇게 해서 나오는 작품이 1981년에 나오는 '크립톤 크로니클'. 여기에 부록으로 크립톤어 문법 등을 몇가지 소개를 하면서 공식적으로 크립톤 알파벳은 118개다라고 확정지었다. 물론 문자 갯수가 118개입니다라고만 했지 실제 어떤 문자인지 전체를 다 보여주지는 못했다.
하지만 크립톤어에 대한 흥미를 불러일으키기 충분한 여러 이야기들이 실렸다. 예를 들면 글자 두 개가 연속으로 사용되면 강한 음이 되고, 복수형의 경우 영어에서 단어 끝에 's'를 붙이는 방식처럼 크립톤어에서는 'o'를 붙여 복수형을 만든다고 하는 식의 간단한 문법 소개.
그리고 크립톤 크로니클이라는 작품 자체가 크립톤의 '엘'가문의 조상들을 소개하는 내용이 주를 이뤘기 때문에 크립톤 인물들의 이름 표기도 중요했는데, 그래서 남자들 같으면 '칼-엘', '조-엘' 하면 '엘 가문의 칼', '엘 가문의 조' 같은 뜻이 되고, 여자들의 경우는 '카라 조엘', '라라 로반'은 '조엘의 딸 카라', '로반의 딸 라라'라는 식으로 표기된다고 설명했다. 여성인데 부모가 누구인지 알 수 없는 경우는 다른 사람의 가문명을 빌려서 가령 '레슬라-라'라고 해서 '라 가문의 레슬라'라는 식으로도 표기가 가능하다고 소개한다.
그 외에도 크립톤 인명을 소개하면서 그 이름의 뜻을 풀어주는데, 가령 '드리구'라는 인물은 '지도자, 대통령'이라는 뜻. 그래서 과학 의회의 수장으로 '드리구 몰리구'라는 인물이 나온다. '로킨'이라는 이름의 경우는 태양신 '라오'의 소유격인 '로'에 '선물'이라는 뜻의 '킨'이라는 단어를 더해 '라오의 선물'이라는 뜻이라고 했다.
그러나 아쨌건 이런 시도에도 불구하고 명확하게 체계를 갖춘 크립톤 문자가 공식적으로 발표되지는 않았다. 그러다가 넬슨 브리드웰 사후에 알 터닌스키라는 인물이 넬슨 브리드웰이 혼자서 했던 크립톤어 연구 기록과 관련된 메모들을 발굴하게 된다. 그리고 이 기록들을 바탕으로 해서 크립톤 알파벳 118개를 정리하고, 각 알파벳에 발음도 붙인다. 그러나 이 버전의 크립톤 알파벳은 정리를 한다고 해도 종류가 너무 많고 복잡했다.
그 다음에 나온 것이 80년대 DC코믹스 리부팅, 존 번의 슈퍼맨 이후 지금까지 사용되고 있는 크립톤 폰트는 삼각형, 사각형, 마름모꼴, 점, 선 등으로 구성되는 문자다. 아마 독자들에게 가장 낯익은 문자일 것인데, 처음에는 어떤 체계 없이 외계어 느낌으로 디자인만 만들었다. 역시 50년대처럼 해독을 목적으로 하는 것이 아닌 외계어 디자인 차원에 나온 문자였다.
이 문자가 자모체계를 갖게 된 건 2000년 이후다. 2000년에 DC 다이렉트. DC코믹스 만화 캐릭터 관련된 상품들 파는 라인인데, 여기 디자이너에 조지 브루어(George Brewer)라는 분이 공식 크립톤 알파벳을 디자인한다. 발음과 같은 것이 명시되진 않은 글자만 있는 문자였지만, 그 창제목적이 어찌보면 세종대왕께서 훈민정음을 만들었던 것과 비슷한 철학을 갖고 있었다. '스타일리시한 외계 문자로 보이되 누구나 쉽게 해독이 가능한 문자여야 한다.' 그렇다면 만화책에 사용되는 외계어를 누구나 쉽게 해독 가능하려면 어떻게 만들어야 하는가? 영어 알파벳과 1대 1 매칭이 될 수 있도록 하는 방법이었다. 작가 입장에선 컴퓨터에서 폰트만 크립톤 폰트로 설정하고 영어로 타자를 쳐넣으면 바로 크립톤어가 입력되고, 독자 입장에선 해당 크립톤 폰트를 폰트표를 놓고 영어 알파벳과 1대 1 대입시키기만 하면 바로 해독이 가능하도록 하는 시스템.
그래서 최초에 독자에게 제안받았던 그 편지의 내용처럼 26개의 문자로 이루어진, 영어 알파벳에 대응하는 문자체계가 탄생했다.
그래서 재미있는 사례로, 2000년대 이후 슈퍼걸이 처음 지구에 도착해서 슈퍼맨을 만나는 내용을 그린 '슈퍼맨 배트맨 : 슈퍼걸'이라는 만화에서는 슈퍼걸이 지구어를 전혀 모르는 상태로 도착해 계속 크립톤어를 하는 장면이 나온다. 독자들은 알파벳 표에 대입해서 슈퍼걸이 하는 말을 해독할 수 있었는데, 한국어판으로 옮길 때는 밑에 따로 한국어로 번역해줘야 했다. 또한 2016년 슈퍼맨 리버스 시리즈의 경우에는 슈퍼맨과 스웜프씽이 대결하는 장면에서 스웜프씽이 크립톤어를 하는데, 이때 슈퍼맨이 '저건 고대 크립톤어라서 나도 알아들을 수가 없다'라고 말을 하긴 하는데, 말풍선 속의 크립톤어를 표에 1대 1 매칭해보면 누구나 알아들을 수 있는 문장이 문법에도 어긋나지 않게 반듯하게 쓰여있다. 그래서 말뜻을 다 알 수 있음에도 불구하고 알아듣지 못하는 고대어로 이해해야 하는 웃지못할 에피소드도 생겨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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